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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기록/세계문화사

명나라 영락제의 주요 업적 심층 분석

by 유담(流談) 2019.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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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영락제의 주요 업적 심층 분석

1. 남해 원정 (1405~1433)

  • 정화의 대규모 원정: 영락제는 환관 정화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7차례에 걸쳐 대규모 해상 원정을 파견했습니다. 60여 척의 함선과 2만 7천여 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함대는 동남아시아를 넘어 인도양, 아라비아 반도, 동아프리카 해안까지 진출했습니다. 이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해상 원정이었습니다.
  • 목적: 영락제는 남해 원정을 통해 몽골 제국의 위상을 재현하고 명나라의 국력을 과시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조공 무역 체제를 확립하여 주변국의 복속을 유도하고,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하여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 결과: 남해 원정은 명나라의 위세를 떨치고 다양한 문물을 교류하는 등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성공적이었으나, 막대한 비용 소모와 실질적인 경제적 이득 부족으로 인해 비판을 받았습니다. 결국 영락제 사후 해금 정책이 시행되면서 남해 원정은 중단되었습니다.

2. 실크로드 (기원전 2세기~15세기)

  • 정의: 실크로드는 중국과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유럽을 잇는 교역로로, 비단을 비롯한 다양한 상품과 문물이 오갔습니다. 육로와 해로를 모두 포함하는 광범위한 교역망으로, 문명 교류와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 개척과 발전: 한나라의 장건이 서역으로 파견되면서 실크로드가 본격적으로 개척되었으며, 이후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교역로가 확장되고 교역량이 증가했습니다. 특히 당나라 시대에는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이 절정에 달했습니다.
  • 영향: 실크로드는 동서양 문명 교류의 핵심적인 통로였습니다. 중국은 비단, 도자기, 차 등을 수출하고, 서역으로부터는 포도, 석류, 불교 등을 수입했습니다. 실크로드를 통해 다양한 종교, 사상, 기술이 전파되었으며, 이는 동서양 문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3. 북경 천도 (1421)

  • 배경: 영락제는 즉위 전 북평(베이징)을 자신의 근거지로 삼았으며, 북방 민족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천도를 결정했습니다.
  • 과정: 1407년 천도를 공식적으로 선언한 후, 14년에 걸쳐 대규모 토목 공사를 진행하여 자금성을 비롯한 황궁과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유학자들의 반대와 난징 기득권층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영락제는 강력한 의지로 천도를 추진했습니다.
  • 결과: 1421년 베이징은 명나라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으며, 이후 청나라 시대까지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북경 천도는 중국의 정치 지형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이후 중국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결론: 영락제는 남해 원정, 실크로드, 북경 천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극적인 정책을 펼쳐 명나라의 위상을 높이고 국력을 강화했습니다. 그의 업적은 명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까지도 연구되고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남해 원정을 진행하였다, 정화가 7차례 60여척의 함대를 지니고 원정 하였으며

동남아시아 인도양 아프리카 해안까지 다녀왔다.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향을 개척하기 까지 60여년 전에 일어난 일이고 

몽고 제국의 위엄을 재현하고 싶었던 영락제의 시도로 결과는 수확은 없었으나 명의 국력을 세계에 과시할 수 있었다, 후에 해금 정책으로 더는 남해 원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실크로드 

증국과 중앙아시아 인도를 거치는 주요교역품을 수입, 수출하는 육로로써 비단길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유라시아의 원거리 무역과 문명 교류를 통로에 대한 상징적 관용적 명칭이다. 한나라의 장건이 실크로드를 개척하였으며 중앙아시아는 중계무역의 수혜를 보고 중은 불교를 수입하고 서역은 중국산 비단을 수입하였다. 

 

북경천도 

 

베이징은 북평왕에 책봉될 때부터 이미 영락제의 정치적, 세력 기반이었고, 베이징에서는 북부지방의 수비대를 효율적으로 감독할 수 있었다. 1407년에 영락제는 천도를 정식으로 지시한 후 1409년부터는 대부분의 시간을 북부에서 보냈다. 그러나 수도이전을 반대하는 유학자들과 난징이 생활의 주 터전화된 환경은 쉽게 수도를 옮기지 못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의 수도 이전계획은 무려 14년만에야 성사된다.

한편으로 문화에도 비상한 관심을 가져 《영락대전(永樂大典)》 편찬을 주관, 추진하였고, 또 《사서대전(四書大典)》·《오경대전(五經大全)》·《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을 편찬케 하여 과거(科擧)의 수험참고서(受驗參考書)로 하였다.

1417년에 베이징을 재건하는 대규모 공사가 시작된 뒤 그는 직접 베이징의 황궁 건립 현장을 시찰하였으며, 한 번도 난징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17년부터 짓기 시작한 베이징의 새 궁전은 1420년에 완공되고, 1421년 1월 1일 그는 베이징을 명나라의 공식 수도임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베이징은 명나라의 도읍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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